ARTIST
ARTIST STATEMENT
상실을 기념하는 것의 의미
Jun, 2024
당장 철거되어도 이상할게 없어 보이는 낡고 좁은 공간에서 처음 시작된 나의 작업은 모두 상실의 감정을 토대로 하였다.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마주해야 하는 불안감과 욕망이 담겨있던 어수선한 나의 작업실은 마치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하나의 불완전한 세계와도 같았다. 그 안에 담긴 고뇌와 방황의 시간은 ‘나’라는 존재를 상실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나에게 작업의 소재가 되어 주었다. 몸부림의 기록을 일기처럼 재현한 작업을 세상에 내어놓는 일은 나를 둘러싼 견고한 외부의 세계에 처음으로 만들어 낸 작은 균열과도 같았다.
작업실 밖, 외부의 세상에도 균열의 흔적은 존재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심 속에서 가차 없이 삭제되어 가는 풍경들. 그것은 수직의 고층 건물단지로 변해버린 어릴 적 내가 살던 추억 속의 동네이기도 하였고, 폐허로 변해버린 낡고 오래된 재개발 지역의 풍경이기도 하였다. 낡고 오래된 것, 기존의 토대로서 존재했던 모든 가치를 똑같은 이념과 욕망이 투영된 건축으로 덮어버린 도시의 단면들. 반복적이고 단순하며 획일적인 이 풍경은 끊임없이 증식하지만, 낯설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는 그럴듯하게 ‘죽어있는 공간’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풍경과 그 속의 사람들을 보면서, 개인적 상실감에 기인하던 나의 작업적 시선은 바깥으로 향하게 되었다. 오늘날 도시는 수많은 개인이 모여 다양한 사회와 구조를 구성하였지만, 결국 그곳에 고립되어 떠나지 못하고, 꿈꾸지 못하며, 관계 맺지 못하는 수많은 상실을 떠안은 개인들의 모습은 마치 철거되기를 기다리는 어느 폐허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고, 폐허가 되어버린 개인에게 도시는 단순히 삶과 죽음만이 존재하는 극한의 서식지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본래 인간의 삶에 관계한 모든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상실되어 간다. 필연적으로 우리는 삶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을 향해 다가간다. 진정한 삶의 시작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속 잃어가는 것의 시작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계절이 변하는 것과 인간의 삶에 무관심한 자연의 섭리를 바라볼 때에도 그렇다. 이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상실을 마주한다. 그 수많은 상황 속에 처한 사람들이 느낄 상실과 절망을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나는 작업을 통해 이러한 상실의 감정을 형상화한다. 가시적으로 말하자면 폐허를 건설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도시풍경이 지나쳐 버린 얼룩과 불규칙들을 다시 재구성한다. 그리고 물리적 사라짐뿐 아니라 개개인의 정신적 망각도 폐허를 건설하는 재료로서 역할 해 준다. 이 결과물은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하나의 공간에 폐허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혹은 지금, 여기를 포함한 모든 것이 언젠가 폐허로 돌아갈 것이라는 전망과 절망을 알게 해 준다. 이는 지금의 순간이 영원할 것이란 굳건한 믿음에 ‘균열’을 만든다. 그러나 상실로부터 기인한 이 균열이 결코 끝을 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모든 ‘상실’을 기념함으로써 우리는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 ‘영원’을 부여할 수 있다.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상실되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은 삶을 지속하게 하는 위로인지도 모른다.
THE MEANING OF COMMEMORATING LOSS
Jun, 2024
All of my work, which started in an old and narrow space that seemed like it could be demolished at any moment, was based on feelings of loss. My messy studio, filled with the anxiety and desires I had to face in order to survive as an artist, was like an imperfect world cut off from the world. The time of agony and wandering contained within it was close to a struggle not to lose the existence of ‘me’. And that memory became the subject of my work. Putting out my work, which reproduced the record of my struggles like a diary, into the world was like the first small crack I created in the solid external world surrounding me.
Traces of cracks existed outside my studio, in the external world as well. Landscapes that are being mercilessly erased in the city where we live. It was the neighborhood of my childhood memories that had been transformed into a vertical high-rise building complex, and the scenery of an old and worn-out redevelopment area that had been turned into ruins. Cross sections of a city where all the values that existed as the old and outdated foundations are covered with architecture projecting the same ideology and desires. This repetitive, simple, and uniform landscape constantly proliferates, but it makes me feel like a plausible ‘dead space’ that has no meaning beyond being unfamiliar. Looking at these landscapes and the people in them, my artistic gaze, which was based on a sense of personal loss, turned outward. Today, the city is a place where numerous individuals gather to form various societies and structures, but in the end, the appearance of individuals who are isolated there, unable to leave, unable to dream, unable to form relationships, and who bear numerous losses, looks like a ruin waiting to be demolished, and to individuals who have become ruins, the city seems like an extreme habitat where only life and death exist.
Originally, everything related to human life is naturally lost as time passes. Inevitably, we approach the end from the moment we begin life. The true beginning of life is the beginning of continuously losing something. This is also true when we grow old, accept the death of a loved one, watch the seasons change, and look at the indifference of nature to human life. In this way, we constantly encounter loss. It is difficult to even fathom the loss and despair that people in those countless situations feel.
I visualize this feeling of loss through my work. In visual terms, it can be seen as constructing ruins. I reconstruct the stains and irregularities that today’s cityscape has passed by. And not only physical disappearances but also the mental forgetfulness of individuals serve as materials for constructing ruins. This result lets us know that ruins exist together in the space where we all live, or the prospect and despair that everything, including the here and now, will one day return to ruins. This creates a ‘crack’ in the firm belief that the present moment will last forever. However, this crack resulting from loss will never mean the end. By commemorating all ‘losses,’ we can grant ‘eternity’ to all things that are disappearing. For us who live in an age of loss, the hope that we will not lose anything may be the comfort that allows us to continue living.
서브토피아 : 중간 지대에서
March, 2023
서브토피아(Subtopia)는 우리가 찾고자 했던 유토피아(Utopia)도 디스토피아(dystopia)도 아닌 그 중간 지점에서 존재한다. 낡고 오래된 것, 기존의 토대로서 존재했던 모든 가치를 똑같은 이념과 욕망, 건축으로 덮어버린 구체적이고 낯익은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사람의 흔적이나 도시를 구성하는 상징, 이정표, 그것들을 연결하는 경로와 같은 요소들을 찾아볼 수 없다. 비밀도, 낯섦도, 수수께끼도 없는 반복적이고 익숙한 이 공간은 낯설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는 ‘추상적 공간’으로만 존재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서브토피아를 죽어 있는 공간(Dead Spaces)이 아닌 살아 있는 공간(Vitalized Spaces)으로 인식하는 것은 서브토피아를 이루는 각각의 블록들 전면에 균질하게 배열된 다수의 창문 때문이다. 이 창문들을 통해 이곳에서 사람과 도시의 흔적을 유추하려 하지만 이내 곧 길을 잃어버린다.
'단자(單子, Monad)에는 창이 없다.' 던 라이프니츠 (Gottfried W.Leibniz)의 말처럼 소통 없이 꽉 막혀 있는 창문은 결코 열릴 것 같지 않으며, 블록 어디에서도 출입구를 찾을 수 없다. 닫힌 구조의 창문들과 사각 블록들은 역설적으로 꿈꾸지 못하며, 관계 맺지 못하고 도시 안에 고립된 개인들을 상징한다. 수많은 개인이 모여 도시와 사회를 구성하였지만, 어떠한 연결장치도 가동하지 않는 폐쇄적인 이곳은 틈새 없이 결합하여 분리 불가능한 ‘한 덩어리’로 압착되어 있다. 실재의 세계는 모조리 증발하고 무한 반복되는 코드와 이미지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내가 만들어낸 서브토피아는 그 의미와 형태가 우리가 사는 현실의 단면을 닮아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곳을 인류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찾고자 했던 이데아(idea), 안정된 질서를 바탕으로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 즉, 유토피아(Utopia)에 다가서는 과정으로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동안 접해온 디스토피아(dystopia)적 상상력의 수많은 문학작품 속 공통 주제인 억압과 통제로 모든 사람이 불행한 세상을 상상이 아닌 경험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SUBTOPIA: THE MIDDLE GROUND
March, 2023
Subtopia is neither the utopia nor the dystopia we were looking for, but somewhere in between. It is a concrete and familiar space that is old and outdated, where all the values that existed as a foundation have been covered by the same ideology, desire, and architecture. There are no human traces here, no symbols that make up a city, no signposts, no paths that connect them. Repetitive and familiar, with no secrets, no strangeness, and no mystery, it exists only as an "abstract space" with no meaning beyond its strangeness. Nevertheless, the reason why we perceive Subtopia as Vitalised Spaces rather than Dead Spaces is due to the large number of windows that are uniformly arranged on the front of each of the blocks that make up Subtopia. Through these windows, we try to infer traces of people and the city, but soon get lost.
In the words of Gottfried W. Leibniz, 'There are no windows in a monad.' The tightly closed windows, without communication, never seem to open, and there are no entrances or exits anywhere in the blocks. The closed windows and square blocks paradoxically symbolise the inability to dream, the inability to relate, and the isolation of individuals within the city. Countless individuals have gathered to form cities and societies, but in this closed, unconnected place, they are squeezed together into an inseparable "lump" without any gaps. The real world has evaporated, and only infinitely repeating codes and images surround us.
The subtopia I have created resembles in meaning and form a cross-section of the reality we live in. Nevertheless, we believe that it exists as a process of approaching Utopia, a world where everyone is happy based on a stable order, an idea that humanity has been constantly searching for throughout history. We have no choice but to believe. Otherwise, we would have to accept a world in which everyone is unhappy due to oppression and control, a common theme in many works of dystopian imagination, as an experience rather than an imagination.
서브토피아 : 익숙한 낯설음
October, 2020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낯섦과 익숙함이 공존하는 통합된 사회관계의 형태이자 상징이다. 즉,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상징적 장소, 이념, 기억 등 눈에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것들이 서로 중첩되어 가시적 기호, 상징, 행동 패턴, 질서 체계로 변형된다. 그때부터 도시는 의미로 가득 찬 구체적 장소가 되고 능동적으로 자가 발전하여 고유한 문명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모습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사람은 살아가는 공간을 닮아간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의미는 불완전하고 지속적으로 교환되며 확대 재생산을 반복하는 물리적 소유의 공간으로 전락했다. 우리에게 다가온 물질의 풍요는 정신적 고뇌와 현대적 비극을 동반한다. 어느덧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물질의 풍요와 정신적 빈곤의 양극화 앞에 놓여있다. 우리에게 허용된 모든 잠재적 가능성과 인간 사회의 정신적 가치는 이제 무감각한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망각은 우리를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의미 상실로 몰아 세운다.
이러한 현대적 비극의 모습은 나의 삶과 정신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동안 나를 담아온 수많은 공간은 비밀도, 낯섦도, 수수께끼도 없는 반복적이고 익숙한 공간들이었다. 이 감옥 같은 익숙함을 벗어나 자유로움을 찾고자 선택했던 행동들은 물리적인 이동이나 자발적인 단절, 합리적인 고립과 같은 일종의 세상과의 ‘단절’이자 ‘떠남’ 이었다. 하지만 믿음과 목적 없는 ‘단절’과 ‘떠남’은 현실도피, 책임회피라는 늪에 나를 잠식시킬 뿐이었다. 내가 닿고자 했던 곳은 결국 형태가 없다. 만져볼 수도, 직접 묘사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길을 잃은 ‘떠남’은 상실이라는 감정으로 깊숙이 자리 잡혀 있다. 닿을 수 없는 그곳을 향한 이 갈망은 물질적인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에 현실과 이상에서 막연히 충동한다.
SUBTOPIA : FAMILIAR UNFAMILIARITY
October, 2020
The familiarity of the beginning goes beyond familiarity to the unfamiliar result. A life that must be familiar with novelty is more of an obsession and should take for granted changes in the world, including ourselves. Now, change is not a matter of choice but a survival and a measure of valuation. The era of knowledge which used to be familiar and information reproduction is over. We must adapt to endless novelty without familiarity, not familiarity.
Familiarity pursues comfort. Familiarity, in other words ‘repeats’, tries not to tell right from wrong and not to move. Attempts to stay away from familiarity are perhaps aware of the danger this comfort poses. Whereas unfamiliarity causes tension. This edge observes and looks out. And also, it renews the perception of objects and allows us to move forward through the right novelty. That is why we have to create unfamiliarity from familiarity.
The numerous spaces that had contained it were repetitive and familiar spaces with no secrets, no unfamiliar things, no riddles. The unfamiliarity of being able to choose beyond this prisonlike familiarity seemed possible only by erasing one's own identity and choosing a physical shift: a nomadic life through leaving. But a place that couldn't be reached even from where it had left. The familiar space I have lost is unshaped, nor can I touch it with my hands, nor is it an entity that can be described or analysed at firsthand. This is because it is a mental space that is a faint trace of the isolated space created by the feeling of loss.
Human beings come to resemble living space. Having a home, living in a particular space or place is a fundamental attribute of existence. The home as the underlying centre of human existence. To take root in one place is having a safe place to look out the world, and having a meaningful mental and psychological attachment to some particular place. Therefore, the home is the center of meaning that can be unexchanged but replaced by anything.
Home is part of us in the world and the first Welt – The World - we experience. But today we are a being who have lost home, and we have been deprived of our attachment to a place called home. No longer does a home function as a center and a fixed point of existential meaning ; it is a material space for private ownership and just the object of property formation. The notion of a home that has been abstracted into space where people stay for a while to increase their wealth does not constitute the foundation for verifying and securing our identity anymore. The essential cause of the tragedy of modern man comes from right here.
We live in an unusual area of the city, and the unknown space unfolds ahead of us. As time goes on, we recognize the surroundings and know some milestones and the route to connect them in their own way. At last, what was an unfamiliar city and an unknown place becomes a familiar place. "abstract space," which means nothing more than unfamiliarity, becomes a "concrete place" filled with meanings. And even before this unfamiliarity goes away, we leave there to face another unfamiliarity.
시대적 혼돈의 물음
December, 2019
점차 모듈화 되어가고 있는 전반적인 사회 구조 시스템 내에서 무한한 다양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기대와, 반면에 개별 기초 단위들의 획일성이 강조되는 모듈화 방식의 구조가 지닌 모순적인 현상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작업은 시작된다.
디지털 시대가 불러온 근대적 가치의 혼란은 산업과 지식과 도시의 모습들을 바꾸어 가고 있다. 우리 세대는 급속한 현대화 속에서 주거양식과 생활양식의 급격한 변화를 겪어야만 했고, 특히 모듈화된 주거공간으로의 변화는 우리들의 생활을 빠른 속도로 기능적 틀에 맞추어 제한해 가고 있다. 주거공간이 갖는 윤리적 기능과 다양성, 정체성이 삭제된 획일화된 공간설계는 근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을 닮아간다고 생각한다. 생활양식이 모듈화 되어감에 따라 삶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인식 또한 그에 맞추어 변화되어 갈 것이다. 또한, 어떤 사회적 이슈나 사안, 가치, 이념들 까지도 가변적이 되어야 하며, 그 참여자 혹은 생산자, 소비자 모두 유연하고 기민한 변용과 변형의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문명 전체로 확장해보면 시대가치, 만유의 미덕, 인간애, 평등의 가치 같은 기존에 쌓여있던 인문학적 토대들도 모듈화의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인간이다. 이러한 일련의 시대적 혼돈과 그로 인한 제2의 인류사적 상실이 ‘또 다른 시작’이 되려면, 궁극적으로 인간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과연 인간 이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답은 예술로서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THE QUESTION OF PERIOD CHAOS
December, 2019
Work begins with the expectation that infinite diversity can be embodied within the generalised social structure which is gradually becoming modularization and A paradoxical phenomenon in the modular architecture that emphasizes the uniformity of independent fundamental units.
The confusion of modern values brought about by the digital era is changing the industry, knowledge, and the appearance of cities. Our generation has had to undergo drastic changes in housing styles and lifestyles amid rapid modernization, and in particular, the shift to modular residential space has restricted the lifestyles to functional structure rapidly. Uniformised spatial design has continued from the modern era until now without considering ethical facility, diversity and identity of residential space.
Human beings come to resemble living space. As lifestyles become modular, our notions and perceptions about life will change accordingly. Also, any social issues, matters, values, or ideologies should be variable, and its participants, producers and consumers should all be the flexible and agile subjects of transformers. If we extend this to the entire civilization, it will mean the existing humanistic foundations such as the value of the times, the virtue of universalism, humanity, and the value of equality cannot be free from modularisation.
But in the end, it is human. In order for this series of period chaos and consequent anthropological loss to be "Another beginning", we will have to find the answer to the fundamental question of human intellect like how far is the limit of human reason. And there is a conviction that the answer to this is possible by art.
획일화된 다양성의 시대
May, 2019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레고 LEGO 장난감을 떠올려 보면 획일화된 사각 모양의 작은 조각들은 하나의 덩어리가 되기도 하고, 그 덩어리는 또 완성품의 중요한 일부가 되기도 하였다. 각각의 호환이 가능하여 과거에 구입한 조각과 오늘 구입한 조각, 그리고 앞으로 구입할 조각 간의 결합이 용이하고 그로 인해 현재의 조각들은 과거의 덩어리 혹은 완성품을 더욱 풍부하게 해줄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듈화 Modularisation – 분리되고, 독립적이며, 교체돨 수 있는 – 방식을 통해 아예 새로운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장난감을 만들 수도 있었다. 이처럼 사소한 놀이를 통해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개성과 다양성을 효율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듈화의 개념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제는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이 모듈화 되어가고 있다. 모듈화란 사전적인 의미로 “몇 개의 관련된 부품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생산해 변경, 조립, 교체 장착하는 기술방식”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로 쓰이던 것이 현재에는 사회 시스템 전반의 구조적 체계부터 주택, 자동차, 가구, 전자기기, 의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모듈화를 적용시킨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의 삶, 각각의 사건들에도 모듈화 구조를 적용시키기도 한다. 이 모듈화는 전체 덩어리의 형태나 활용 등에 있어 무한한 다양성을 갖출 수 있으나 그와 동시에 각 개체들이 획일성을 갖춰야 하는 아주 근본적이고도 고질적인 한계 또한 지니고 있다.
사람은 살아가는 공간을 닮아간다. 특히 모듈화된 주거공간으로의 변화는 우리들의 생활양식을 급속도로 기능적 틀에 맞춰 제한해 갔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화로 인해 건축은 한정적인 면적에 최대한의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아파트, 연립, 다세대 주택 등의 집단 주거 형태로 변모해 왔다. 사람들의 주거생활을 의, 식, 주, 정도의 기능으로 나눈 다음 건물의 공간을 할당하는 방식으로 설계 되었다. 이러한 건축 양식의 변화는 현대화와 더불어 발생하는 여러 사회 문제들의 단기적인 해결책이 되었을지는 모르나 우리의 삶은 기능성과 생산성을 기준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낡고 오래된 것들, 기능이 상실되었다 판단되는 것들은 가차없이 삭제되기를 반복 하였다. 주거공간이 갖고 있는 윤리적 기능과 다양성, 정체성이 삭제된 획일화된 공간설계는 근대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고 있다. 더욱 우려가 되는 부분은 현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들에도 지금의 이러한 행동, 생활양식들이 그대로 답습되어 살아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급속한 현대화 속에서 급변화 되어온 주거양식과 생활양식을 겪어야만 했다. 이따금 나는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획일화 되어가는 사회구조 안에서 그에 충돌하는 다양한 개인의 의견들이 사회라는 거대 집단에 흡수되는 것을 경험 할 때마다 나의 생각과 의견이라는 것들도 어쩌면 텅 빈 상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 라는 개인의 존재 인식은 어쩌면 획일적 사회구조 안에서 모듈의 기능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집은 세계 안에 있는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최초의 세계 Welt 이다. 나는 작업을 통해 우리의 시대에 상실된 인간의 윤리적 문제와 삭제된 개인공간의 기능을 제시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사회의 구조가 개인의 공간인 집을 단순히 거주의 공간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삶이 모이고 흩어지는 수 많은 세월이 축적된 새로운 형태의 유토피아 Utopia 로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STANDARDIZED ERA OF DIVERSITY
May, 2019
When we think of Legos we used to play with as a child, the standardized square-shaped pieces agglomerated and the lump became an important part of the masterpiece. Lego pieces are compatible each, so it is easy to combine pieces purchased in the past with those from today and those from in the future, this being so the current pieces enrich the lumps or finished goods of the past continuously. This modularity – separated, independent, and interchangeable – produce entirely new results and create toys for own sake. Through this play, we have been able to experience the concept of modularization, which is possible to express individuality and diversity in an efficient way from early childhood.
Now, many things around the world are becoming module. Modularity means, in a dictionary sense, "technical method of producing several related components in a single mass and then altering, assembling, and replacing them." Modularity as a computer programming language has found in many different fields such as the entire social system, housing, vehicles, electronics, and clothing. Furthermore, it is so for human life, and every single event. This modularization can have infinite diversity in the form and utilization, but it also has very fundamental and chronic limitation that each entity must have uniformity at the same time.
Human beings come to resemble living space. In particular, modular residential space has restricted the lifestyles to functional structure rapidly. Due to the population growth and urbanization, construction has been transformed into collective housing form, like as flats, terraced and multiplex house. For efficient space usage, in addition, the interior has been designed by allocating space just for food, cloth and shelter. This transition of architecture may have been a short-term solution to various social problems, though human lives are beginning to look at the life solely on the basis of functionality and productivity. In this process, old, battered things and things losing own function are ceaselessly eliminated without mercy. Uniformised spatial design continues from modern era until now without considering ethical facility, diversity and identity of residential space. Of even more concern is the fact that the current generation as well as the next generation has great potential for following behaviors and lifestyles from the present.
Our generation had to go through a sudden turn of housing and lifestyle amid rapid modernization. Somewhile, I tend to think that I might lose my own in the middle of this whirlwind of great change. Whenever I witness conflicting various comments of individuals are disregarded to the macroaggregation, the nation that my thoughts and opinions maybe empty dream or illusion is ineffaceable. The reason is that I regard my existence just as a module in a monolithic society.
Home is part of us in the world and the first Welt (World) we experience. With works, I intend to present and formulate the missing ethic issues of human beings and the vanishing function of personal space of our times. Ultimately, there is hope that society recognize the home (personal space) as not just a living space but a new form of Utopia in which human lives have accumulated and dissolved over countless years.
상실의 기억
August, 2018
1. 누구나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공간에 대한 인식은 개인의 활동과 그에 따른 기억을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삶 속을 지나온 기억과 공간이라는 이 추상적인 어휘들은 본래의 사전적 의미에서 내면적 변화를 겪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바라보는 모든 것은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고,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 그렇기에 존재 Existence 의 영존 永存 은 보장받을 수 없으며 매 순간 변화 앞에 오는 ‘상실감’ 은 인간이기에 느껴야만 하는 필연적 감정인지도 모른다. 많은 철학과 심리학적 이론에 의거한다면 ‘기억’ 은 개인의 정체성을 전제하며 반대로 정체성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구성된다고 한다. 즉 경험한 모든 것들의 상실은 기억의 상실과 연관하며, 결국 ‘나’ 라는 존재의 상실까지도 야기할 수 있다는 의미다.
2. 나에게 이러한 이론이 내 삶에 직접적으로 적용되고 와 닿았던 순간이 있다. 재건축과 재개발의 바람으로 강제철거 되는 시대의 풍경 속에서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집의 내밀함은 마치 개인의 집착이 만들어낸 공간을 들여다보는 호기심을 자극했고, 동시에 기억의 보고가 폐허처럼 잔존해있는 모습에서 허무, 불안, 상실의 감정을 느꼈다. 이곳 저곳 흩어진 물건들에서는 미처 끝맺지 못한 이야기와 잊혀진 이야기, 그리고 누군가가 꿈꾸던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듯했다. 철거되는 집의 모습은 마치 대상의 존재성이 사라진 – 파괴된 – 후 남겨진 상실의 감정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처럼 불안정한 거주환경과 재개발 지역에서의 생활 등의 직접적 경험은 지극히 사적인 감정에 집중하던 작업적 시선이 ‘집’ 이라는 공간에 담긴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으로 확장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주었다.
THE MEMORY OF LOSS
August, 2018
1. Anyone must have some memories of the space they stayed. This is why the cognition for space is consisted of the individual’s activities and resulting memories. Thus, these abstract words – memory and space – that have passed through my life underwent internal changes out of original meaning. Everything we’re looking at, including ourselves, is going to transit continuously, and fade away someday whether we want or not. This being so, there is no guarantees in the perpetuity of existence, then the sense of loss that comes at every moment of change may be felt as human being. On the basis of various theories from philosophy and psychology, memory presupposes identity, identity is inversely composed of past experiences. That is to say, the loss of everything experienced is related in the loss of memory, it leads perhaps to loss of my existence.
2. There is a moment when this theory touched me and applied to my life personally. In the scene of the time where everything is demolished by force, because of the craze for rebuilding and redevelopment, I was also not free. The clandestineness of ruinous home has aroused curiosity to look into the space with personal voracity, and the ruined treasury of knowledge have made futility, anxiety and deep sense of loss at the same time. The scattered things seem to reflect unfinished stories, forgotten stories, and stories of someone’s dream. The demolished house is in the same vein as the emotion of loss left after the object’s existence was gone – destroyed. The personal experiences such as unstable residential environment and living in the redevelopment area and so on have served as important momentum to expand the eyes of work which focused on very private feelings into the memories and emotions of people in the space called ‘home’.